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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닝 가이드 (25): 잡채밥, 반찬에서 식사로 진화한 어느 날의 한 그릇

다이닝 가이드

by 도슐랭ㅡ 2025. 6. 1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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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고독한 자취생 블로그 / 정릉 하오하오츠 잡채밥 // 사진 = 유미짱의 예쁜날 / 군산 서원반점 잡채밥

 

 

반찬이던 잡채, 밥을 덮다

잡채밥을 시키면, 처음엔 어색합니다.
왜냐면 잡채는 늘 반찬으로 먹어왔으니까요.
명절 상차림에 빠지지 않던 그것, 당면에 간장 베이스 소스, 잔잔하게 볶은 야채들과 고기.
큰 접시에 담겨 가운데 놓이고, 옆엔 항상 밥이나 전이 있었죠.
근데 어느 날 중식당에서 밥 위에 잡채가 얹힌 ‘잡채밥’을 마주하고는,
조금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 이건 반찬이 아닌데?

중식당에서 나오는 잡채밥은 우리가 아는 그 잡채와 다릅니다.
무엇보다 소스가 더 진하고, 전분기가 돌고, 불향이 느껴지죠.
당면도 더 탱탱하고 투명하게 볶아져 나옵니다.
색도 더 진하고, 고기도 더 분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이건 단순히 ‘잡채를 밥 위에 얹었다’가 아니라,
‘밥 위에 올릴 전용 잡채’로 완성된 별개의 요리입니다.


당면의 질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쯤에서 생각해볼 건 당면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당면은 고구마 전분이지만,
중식 잡채에서는 전분 함량이 높은 당면이 많이 쓰이고,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 후 다시 팬에서 고온으로 볶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당면은 탱글함을 유지하면서도,
소스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결을 갖게 되죠.

중식 잡채의 당면은 굵기가 더 두툼하고, 씹는 맛이 강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간이 되어 있기보다,
소스와 다른 재료들과의 조화 속에서 맛이 드러납니다.
입에 넣었을 때 미끌미끌하지 않고, 쫄깃하면서도 포슬한 느낌.
사실상 당면 하나로 요리의 품격이 갈립니다.


덮밥이라는 형식 속의 질서

잡채밥은 '덮밥'입니다.
중식에서 덮밥은 무언가를 정리된 질서로 밥 위에 올린다는 뜻인데,
이건 단순히 얹는다는 의미 이상이에요.
‘어떤 소스가 어떤 밥과 만나야 가장 좋을까’를 고민한 끝에 나오는 구성입니다.

그 점에서 잡채밥은 꽤 계산된 요리입니다.
당면이 너무 많아도 밥이 묻히고,
야채가 너무 많아도 물이 생기고,
고기가 적으면 심심하고,
전분 농도가 지나치면 질척해지죠.
이 모든 걸 조율하면서, 밥과 당면, 소스, 재료가 하나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래서 이건 반찬의 변형이 아니라, 덮밥이라는 문법으로 새롭게 쓴 잡채의 문장이에요.


구성은 단순하지만 레이어는 다르다

잡채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크게 새롭지 않습니다.
목이버섯, 돼지고기(혹은 소고기), 양파, 당근, 죽순, 부추.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이 재료들의 조합은 꽤 정교합니다.
특히 목이버섯은 잡채에서 단순한 식감 이상의 역할을 하죠.
전체가 미끄럽고 부드러운 질감일 때, 목이버섯은 툭 하고 씹히는 지점을 만들어줍니다.

양파와 당근은 단맛을, 부추는 향을 더해줍니다.
돼지고기는 너무 비계가 많으면 기름져지고, 너무 살코기만 있으면 뻑뻑해지기 때문에,
기름과 살의 비율이 적당한 부위를 써야 하고요.
죽순은 생략되는 경우도 있지만, 있다면 씹는 재미가 한층 올라갑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잡채밥은 ‘흔한 것들로 만든 정교한 요리’라는 점에서
단단한 요리자의 감각이 요구되는 메뉴입니다.


잡채밥은 한식일까, 중식일까

잡채밥을 두고 ‘한식이냐 중식이냐’라는 논쟁은 은근히 흥미롭습니다.
잡채 자체는 명백히 한식 계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중식당에서 먹는 잡채밥은 한식 잡채와는 거리가 꽤 있죠.
소스는 중식의 농후한 느낌이 강하고, 조리 방식도 고온의 웍에서 빠르게 볶아냅니다.
전분 농도로 마무리하는 것도 전형적인 중식 스타일이고요.

그렇다면 잡채밥은 한국 중식, 즉 화교 중식의 산물이라고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한식과 중식의 경계에 있지만, 어느 쪽도 아닌
한국이라는 땅에서 자라난 덮밥 스타일이라는 거죠.
짬뽕이나 탕수육처럼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자란 중식 요리 중 하나입니다.

 


잡채밥이 메뉴판에서 말해주는 것

흥미로운 건, 잡채밥은 대부분 메뉴판 ‘식사류’의 후반부에 조용히 들어 있습니다.
짜장면, 짬뽕, 볶음밥처럼 대중적인 메뉴 뒤에 조심스레 위치한 이름.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찾는 사람은 꼭 찾는 메뉴라는 점에서
잡채밥은 늘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조용한 인기 메뉴입니다.

특히 중식당에서 잡채밥은
짜장도 짬뽕도 아닌, 볶음밥도 아닌,
살짝 다른 무드를 원하는 날 택해지는 메뉴입니다.
그리고 먹고 나면 항상 든든하죠.
"이걸 왜 자주 안 먹었지?" 싶은 후회와 함께요.

 


비슷한 듯 다른 요리들

잡채밥은 다른 중식 덮밥들과 닮은 점도, 다른 점도 많습니다.
예컨대 유산슬밥과 비교하면
소스의 점도나 전분 사용은 비슷하지만,
식감은 확연히 다릅니다.
유산슬이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조화를 추구한다면,
잡채밥은 씹는 맛, 불향, 밥의 존재감까지 살아 있죠.

또 간짜장과도 살짝 닮았습니다.
둘 다 소스를 따로 조리해 밥이나 면에 얹는 구조고,
‘비비는 재미’가 있지만
간짜장은 단맛과 기름맛이 더 두드러지고,
잡채밥은 감칠맛과 재료들의 식감이 보다 강조됩니다.

결국 잡채밥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딱 좋은 지점을 만들어냅니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심심하지도 않은.
한 입 한 입이 똑 떨어지는 정돈된 밥.

 


짜장을 부어주는 집, 안 부어주는 집

잡채밥 얘기를 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잡채밥에 왜 어떤 집은 짜장을 부어주고, 어떤 집은 안 줄까?”

이건 꽤 흥미로운 차이인데,
사실 정해진 기준이나 공식은 없습니다.
지역적 차이도 크지 않고요.
그 집 셰프의 판단, 또는 손님들이 오랜 시간 만들어낸 관성에 가깝습니다.

짜장을 부어주는 집은 보통 잡채 소스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스타일이거나,
손님이 ‘밥엔 짜장이 있어야지’라고 생각할 것을 미리 고려해
친숙함을 위해 짜장을 살짝 곁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짜장을 따로 주지 않는 집은
잡채 자체의 맛과 밸런스에 집중합니다.
‘이건 잡채밥이지, 잡채+짜장밥은 아니다’라는 일종의 정체성 지키기죠.
특히 중식당 자체의 스타일이 깔끔하고 웍 조리가 잘 살아 있는 경우,
오히려 짜장이 등장하지 않는 편이 더 일반적입니다.

재밌는 건, 이 차이를 손님들도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짜장을 기대하고 시켰다가 안 나와도,
잡채가 충분히 맛있으면 딱히 불만이 없습니다.
반대로 짜장이 나와도,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죠.

결국 이 한 국자에도 그 집의 스타일이 드러납니다.
잡채밥에 짜장을 부어주는지 아닌지는
기준이 아니라 ‘철학’입니다.

 


잘 만든 잡채밥은 정리된 밥상이다

잡채밥은 이름만 보면 단출하지만,
그 안에 있는 요소들은 꽤나 다양합니다.
당면, 고기, 야채, 소스, 전분, 밥—all in one.
한 숟갈에 다양한 식감을 겹쳐내는 그 기술이야말로
잡채밥이 단순한 ‘잡채+밥’이 아니라
밥상 전체를 요약한 한 그릇이라는 걸 증명합니다.

그래서 잡채밥은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뒤늦게 ‘아, 잘 먹었다’는 말이 나오는 요리입니다.
속은 든든하고, 입 안은 정돈돼 있고,
어느 하나 튀지 않으면서도 기억에 남는 맛.

다음에도 인상적인 한입을 담아올게요.
맛있는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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