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닝 가이드

다이닝 가이드 (27): 어향가지, 생선 없는 생선 향 이야기

도슐랭ㅡ 2025. 6. 12. 22:43

사진 = 러블러블닝 :) 블로그 / 남대문 연길반점 어향가지

 

 

 

어향가지, 이게 뭐지? 싶었던 그날부터

처음에 어향가지라는 메뉴를 봤을 땐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일까 싶었습니다.
‘어향(魚香)’이라는 말에서 일단 긴장이 들어가고,
‘생선 향 나는 가지?’라는 해석이 따라붙었죠.
가지도 호불호가 갈리는데, 생선 향까지 곁들여진다니…
처음엔 왠지 낯설고, 괴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한 입 먹어보면 생각이 바뀝니다.
생선 향은 없고,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하고,
살짝 새콤하고 은근히 매콤한 소스가 가지에 착 붙어 있습니다.
촉촉한 듯 쫄깃하고, 입에 넣는 순간 숟가락이 멈추지 않죠.
이쯤 되면,
"이거 생선은 없는데 왜 이름이 이래?" 하는 의문이 따라옵니다.

 


‘어향(魚香)’의 진짜 의미는?

중국 요리에서 ‘어향’은 생선 요리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 생선 요리에 쓰던 양념 방식을 말합니다.
고기든 채소든 이 양념 스타일로 조리하면 ‘어향~’이 되는 거죠.
즉, ‘어향’은 생선 향이 아니라, 생선 요리에 최적화된 양념 조합입니다.

그럼 그 양념이 뭐냐고요?
기본적으로는 다음의 조합입니다:

다진 마늘

생강



두반장

고추기름

간장

식초

설탕

이 조합을 센 불에서 한꺼번에 볶아내면,
맵고 짭조름하면서도 새콤하고 은은한 단맛이 어우러집니다.
이게 바로 어향 소스입니다.
그걸 가지를 튀기거나 볶은 뒤에 끼얹으면 어향가지가 되는 거죠.

 


가지 요리? 별로 안 좋아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가지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재료입니다.
특히 익힌 가지 특유의 물컹함,
말랑한데 축축한 그 식감을 못 견디는 분들이 많죠.
“비닐 씹는 것 같다”는 말도 종종 들리고요.

그런데 어향가지만큼은 다릅니다.
이 요리는 보통 가지를 튀기거나 강불에 빠르게 볶은 뒤,
어향 소스를 입혀 마무리되기 때문에
가지가 흐물거리기보단 촉촉하면서도 탄력 있는 식감을 갖게 됩니다.

특히 가지를 얇게 잘라 전분 옷을 입혀 튀긴 뒤 소스를 입히는 방식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바로 그 조화 때문에 어향가지가 가지 요리의 반전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고기보다 강한, 채소의 반격

 

사진 = 시계는 와치 블로그 / 건대 명봉반점 어향육슬


어향가지의 쌍둥이 형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향육슬(魚香肉絲), 즉 어향 소스를 돼지고기 채 볶음에 적용한 요리죠.
이건 말 그대로 고기 요리고,
맛도 꽤 진하고 식감도 뚜렷해서 중식당 식사류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즘은 어향육슬보다 어향가지가 더 자주 보입니다.
채소 요리인데도 식감이 다양하고,
소스가 워낙 강해서 고기가 없어도 전혀 심심하지 않죠.
그만큼 어향가지가 가진 재료력 이상의 존재감이 크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가지는 조리 후 기름과 소스를 흡수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어향 소스와의 궁합이 어지간한 고기보다 훨씬 뛰어나기도 합니다.
한입 먹고 나면, ‘이게 고기보다 더 고기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죠.


가정식과 중식당 사이, 어향가지의 자리

예전에는 어향가지가 고급 중식당에서만 볼 수 있는 요리였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덮밥집, 마라탕 전문점, 도시락 가게 메뉴판에서도
슬쩍 이름을 보게 되죠.
그만큼 이 요리는 중식 고정관념을 깬 채소 요리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맛있으니까요.
채소만으로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요리가 흔치 않거든요.
게다가 식사로도 가능하고, 반찬으로도 좋고, 술안주로도 괜찮습니다.
정형화된 포지션이 아니라, 그때그때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요리.
요즘 음식 트렌드에 딱 들어맞는 유연함이 있죠.

 


덮밥으로 만나는 어향가지

 

사진 = 세 아이 엄마의 힐링공간 블로그 / 인천송도 카이웨이 어향가지덮밥


어향가지의 존재감을 가장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건,
밥 위에 얹혔을 때입니다.
덮밥으로 등장하는 어향가지는
가지의 촉촉함과 소스의 점성이
고슬한 밥에 그대로 스며들어
숟가락이 절로 움직이게 하죠.

이 덮밥 버전은
매운맛을 강조하거나
달콤한 풍미를 살리는 등
식당마다 조금씩 스타일이 다릅니다.

매콤한 어향가지 덮밥: 청양고추나 고추기름을 더해 자극을 강조

달달한 어향가지 덮밥: 식초보다 설탕을 더 살려 한국식 양념에 가깝게

전분 농도 조절형: 소스가 진득한지, 흘러내리는지에 따라 완성도 차이

재밌는 건, 덮밥 스타일로 어향가지를 처음 먹은 사람들이
‘이게 가지였어?’라고 놀라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겁니다.
정말 잘 만든 어향가지는
재료보다 소스와 식감의 조합으로 기억되니까요.

 


비슷한 듯 다른 가지 요리들

어향가지를 한 번 맛보고 나면
“그럼 어향 말고 다른 가지 요리는 뭐가 있지?” 하고 궁금해집니다.
실제로 비슷한 요리들이 있지만,
디테일에서 꽤나 큰 차이를 보입니다.

마파가지: 마파두부처럼 고기와 두반장 중심의 볶음 소스, 매운맛 강조

마늘가지볶음: 간장과 마늘 중심의 담백한 스타일

지삼선(가지+감자+피망 볶음): 채소의 조합과 불향에 집중

가지튀김 or 간장가지조림: 일본식 또는 한식 스타일

이런 요리들도 각자의 매력이 있지만,
어향가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완성된 맛의 구성을 보여주는 요리입니다.
재료 하나를 갖고 여기까지 끌어올린다는 게,
참 흥미롭고도 감탄스럽습니다.

 


가지, 이 정도면 주연

우리는 흔히 가지를
‘반찬’, ‘부재료’, ‘사이드’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향가지는 다릅니다.
접시에 가지 하나만 올려도,
밥 한 공기와 함께면 한 끼가 정리됩니다.
고기 없이도 만족스럽고,
질리지도 않고,
먹고 나면 ‘다른 가지 요리는 왜 이렇게 안 만들지?’ 싶은 생각이 들죠.

잘 만든 어향가지는
그 자체로 충분한 요리입니다.
이건 생선도 아니고, 고기도 아니지만
맛은 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합니다.
생선 향이 없는데도,
기억에는 분명하게 남는 요리.
그게 어향가지입니다.

다음에도 인상적인 한입을 담아올게요.
맛있는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