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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닝 가이드 (31):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보다 토마토의 문제

다이닝 가이드

by 도슐랭ㅡ 2025. 6. 1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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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어디든 떠나율 블로그 / 천안 신불당 시멘트 토마토파스타

 

 

 

빨간 맛의 시작

토마토 스파게티.
누군가에겐 초등학교 앞 분식집의 추억이고,
누군가에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첫 데이트 기억일 겁니다.
정통 이탈리아 요리라기보단
한국식 양식의 클래식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이 요리는 파스타라는 장르에서 가장 오래된 맛 중 하나입니다.

18세기 말, 나폴리의 가난한 집에서
갓 딴 토마토를 으깨 파스타 위에 올려먹던 방식이
지금 우리가 아는 토마토 파스타의 원형입니다.
고기나 해산물 없이,
그저 토마토와 올리브 오일, 마늘만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단순한 구성이죠.
하지만 여기에 파스타라는 면과의 조화가 들어가면
이 단순한 재료가 꽤나 깊은 맛을 냅니다.

 


‘소스’가 아니라 ‘토마토’가 문제다

토마토 스파게티는 흔히 ‘토마토 소스를 쓰는 파스타’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진짜 핵심은 어떤 토마토를 썼느냐입니다.

생토마토,
통조림 홀 토마토,
퓨레나 페이스트,
심지어 케첩을 살짝 섞는 방식까지
재료 선택에 따라 맛의 무게가 전혀 달라집니다.

생토마토는 산미와 수분이 많아 상큼하지만 소스의 농도가 부족하고,

홀 토마토는 단맛과 감칠맛이 잘 살아 있으면서도 텍스처가 풍성하죠.

페이스트를 많이 넣으면 깊은 맛은 있지만 부담스럽고,

케첩이 들어가면 어릴 적 추억은 떠오르지만 ‘이게 파스타냐 볶음면이냐’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토 스파게티를 정말 맛있게 하려면
좋은 토마토 고르는 눈이 가장 중요합니다.
심플한 요리일수록, 핵심 재료가 모든 걸 결정하니까요.

 


파스타의 품종과 삶기, 그리고 시점

이야기는 늘 면으로 돌아옵니다.
토마토 스파게티는 소스가 진하든 묽든 간에,
면이 그 맛을 얼마나 품어내느냐가 중요하죠.

스파게티니처럼 얇은 면은 가볍고 빠르게 입에 감기지만,

버미첼리나 링귀네는 소스와의 밀착력이 조금 더 있죠.

퍼펙트한 삶기 타이밍은 ‘알덴테’보다도,
소스와 볶을 시간을 고려한 30초 전 건짐입니다.

특히 토마토 소스는 볶는 과정에서
면과 소스가 ‘끓는 지점’에서 맛이 배어들기 때문에
삶기 → 건짐 → 소스 투하 → 볶기
이 4단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이 맛의 핵심입니다.


고기가 들어가면 볼로네제? 아니요, 그냥 토마토 스파게티입니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고기가 들어간 토마토 스파게티는 ‘볼로네제’고,
고기가 없으면 그냥 ‘토마토 스파게티’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볼로네제는 아예 다른 요리입니다.

볼로네제는 라구 소스의 일종으로
소고기(혹은 돼지고기) 다짐육을 오랜 시간 볶아 만든 육향 가득한 소스에
토마토는 조연처럼 들어갑니다.

반면, 우리가 흔히 먹는 고기 토마토 스파게티는
토마토를 중심으로 만든 소스에 고기를 곁들인 형태죠.

이 둘의 방향성은 다릅니다.
앞은 고기 베이스에 토마토를 입힌 것,
뒤는 토마토 베이스에 고기를 넣은 것.
같은 듯 다르고, 실제로도 맛의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해산물이 들어가면 마리나라? 그것도 아닙니다

토마토 + 해산물 조합은 흔히 ‘마리나라’로 불리지만,
이 또한 용어상의 착각이 많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Marinara는 본래 뱃사람식 토마토 소스란 뜻으로,
마늘, 토마토, 바질 등으로 만든 기본 토마토 소스를 뜻합니다.

여기에 해산물이 들어가면 흔히 ‘마레’(mare = 바다) 라고 부르는데,
정확한 이름은 스파게티 알라 페스카토라(spaghetti alla pescatora)
즉, 어부의 파스타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냥 "해산물 토마토 스파게티"라는 말이 더 익숙하죠.
실제로는 홍합, 오징어, 새우, 조개 등이 푸짐하게 들어간
강한 감칠맛 중심의 요리입니다.

 


한국식 토마토 스파게티의 진화

한국에서 토마토 스파게티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로 자리잡았습니다.
이태리식보다는 케첩이나 설탕이 살짝 들어간 단맛 나는 소스,
두툼한 베이컨, 옥수수 알갱이, 심지어는 피망과 양파가 가득 들어간
혼종의 형태로 발전했죠.

이걸 누가 뭐라고 하진 못합니다.
왜냐면 맛있거든요.
게다가 이 스타일은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볶음밥처럼 볶아진 토마토 면 요리로 재창조된 거죠.
고추장을 약간 넣은 ‘매콤 토마토 파스타’도 이 맥락입니다.

결국 토마토 스파게티는
각자의 입맛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방향으로 튀어갈 수 있는 베이스 요리입니다.

 


지금 먹는 토마토 스파게티가 정답이다

토마토 파스타는 처음엔 소박했고,
중간엔 다양했고,
지금은 개인화되었습니다.
고기를 넣든, 해산물을 넣든, 채소만 써도,
어떤 방식이든 ‘토마토’라는 테마 안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진 거죠.

그 말은 곧
"내가 지금 먹는 토마토 스파게티도 그 자체로 완성된 레시피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리의 역사라는 건 결국
재료의 변화보다 입맛의 적응으로 설명되는 법이니까요.

다음에도 인상적인 한입을 담아올게요.
맛있는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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